중용혹문6
或問: “此其稱舜之大知, 何也?”
"여기서 순임금의 큰 지혜를 칭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曰: “此亦承上章之意言如舜之知而不過, 則道之所以行也. 蓋不自恃其聰明而樂取諸人者如此, 則非知者之過矣. 又能執兩端而用其中, 則非愚者之不及矣. 此舜之知所以爲大而非他人之所及也. 兩端之說呂楊爲優, 程子以爲執持過不及之兩端, 使民不得行, 則恐非文意矣. 蓋當衆論不同之際, 未知其孰爲過孰爲不及而孰爲中也. 故必兼總衆說以執其不同之極處而求其義理之至當, 然後有以知夫無過不及之在此而在所當行. 若其未然則又安能先識彼兩端者之爲過不及而不可行哉!
"이는 또한 앞장의 뜻을 이어 만약 순임금의 지혜가 지나치지 않으면 도가 행해짐을 말한다. 대개 스스로 그 총명함을 믿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서 취하기를 즐김이 이와 같으면 지혜로운 자의 지나침이 아닐 것이다. 또한 양단을 잡아서 그 중을 사용할 수 있으면 우둔한 자의 미치지 못함이 아닐 것이다. 이는 순임금의 지혜가 크고 다른 사람이 미칠 바가 아닌 까닭이다. 양단에 대한 논의는 여씨와 양씨가 우수하다. 정자는 지나침과 모자람의 양단을 잡아서 백성으로 하여금(지나침과 모자람의 양단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문의가 아닌 것 같다. 대개 여러 논의가 같지 않을 때, 누가 지나치고 누가 미치지 못하고 누가 중에 맞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반드시 여러 설을 겸하고 총론하여 그 동일하지 않은 극처를 잡아서 의리의 마땅함을 구한 연후에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음이 여기에 달려 있고, 마땅히 행해야 하는 바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어찌 그 양단이 지나치거나 모자라서 행할 수 없음을 먼저 알 수 있겠는가!"
중용혹문7
或問: “七章之說. 曰: “此以上句起下句如詩之興耳. 或以二句各爲一事言之,則失之也.”
"7장의 설에 대해 묻습니다." "이는 앞장으로써 뒷장을 이끎이 마치 시가 일으키는 것과 같을 뿐이다. 혹여 두 구절을 각기 하나의 일로 말한다면 그릇된다."
중용혹문8
或問: “此其稱回之賢, 何也?”
"여기서 안회의 현명함을 칭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曰: “承上章不能期月守者而言如回之賢而不過, 則道之所以明也. 蓋能擇乎中庸, 則無賢者之過矣. 服膺弗失, 則非不肖者之不及矣. 然則茲賢也. 乃其所以爲知也歟!
"앞장 不能期月守를 이어 만약 안회의 현명함이 지나치지 않으면 도가 밝아짐을 말한다. 대개 중용을 택할 수 있으면 현명한 자가 지나침은 없다. 가슴에 잘 간직하여 잃지 않으면 불초자라도 미치지 못할 바가 아니다. 그렇게 되면 현명함이 무성해진다. 이는 지혜로워지는 까닭일진저!"
曰: “諸說如何?”
"여러 설은 어떻습니까?"
曰: “程子所引屢空張子所引未見其止皆非論語之本意唯呂氏之論顔子有曰: '隨其所至,盡其所得,據而守之, 則拳拳服膺而不敢失勉而進之, 則旣竭吾才而不敢緩,此所以恍惚前後而不可爲象,求見聖人之止,欲罷而不能也.' 此數言者乃爲親切確實而足以見其深潛縝密之意.學者所宜諷誦而服行也. 但求見聖人之止一句文義亦未安耳. 侯氏曰: '中庸豈可擇. 擇則二矣.' 其務爲過高而不顧經文義理之實也. 亦甚矣哉!
"정자가 인용한 屢空이나 장자가 인용한 未見其止는 모두 논어의 본의가 아니다. 오직 여씨가 안회를 논하여 말하기를 '그 다다른 바를 따르고 그 얻은 바를 다하여 거기에 근거하여 지킨다면 가슴에 꽁꽁 잘 간직하여 감히 잃지 못하고, 근면하여 나아가면 나의 재능을 이미 다하여도 감히 게으를緩 수 없다. 이는 문득 홀연히 앞뒤에 계셔 형상할 수 없고 성인이 머무는 바를 보기를 구하여 그만두고자 하여도 그만 둘 수 없는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이 몇마디는 곧 친절하고 확실하여 그 심잠하고 진밀한 뜻을 보기 족하다. 배우는 자가 마땅히 풍송하고 복행해야 할 바이다. 하지만 성인이 머무는 바를 보기를 구한다는 구절은 문의가 또한 편안하지 못할 따름이다. 후씨가 말하길, '중용을 어찌 택할 수 있겠는가, 택한다면 둘일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가 힘쓰는 것이 지나치게 높고 경문 의리의 실질을 돌아보지 않음이 또한 심하다!"
중용혹문9
或問: “中庸不可能, 何也?”
"중용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曰: “此亦承上章之意以三者之難明中庸之尤難也. 蓋三者之事亦知仁勇之屬而人之所難,然皆必取於行而無擇於義且或出於氣質之偏,事勢之迫未必從容而中節也. 若曰: “中庸, 則雖無難知難行之事,然天理渾然無過不及,苟一毫之私意有所未盡, 則雖欲擇而守之而擬議之間忽已墮於過與不及之偏而不自知矣. 此其所以雖若甚易而實不可能也. 故程子以克已最難言之其旨深矣. 游氏以舜爲絶學無爲而楊氏亦謂有能斯有爲之者其違道遠矣. 循天下固然之理而行其所無事焉夫何能之有, 則皆老佛之餘緖而楊氏下章所論不知不能爲道遠人之意亦非儒者之言也. 二公學於程氏之門號稱高第而其言乃如此殊不可曉也已.”
"이 또한 앞장의 뜻을 이어 세 가지의 어려운 것으로써 중용이 더욱 어려운 것임을 밝힌 것이다. 대개 세 가지의 일은 지,인,용의 부류인데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바이다. 하지만 모두 반드시 행에서 취하여도 의에서 택함이 없다. 게다가 혹 기질의 치우침과 사세의 급박함에서 나오기에 반드시 종용 중절하지는 않는다. 만약 '중용은 비록 알기 어렵거나 행하기 어려운 일이 없더라도 천리가 혼연하여 과불급이 없다'라고 말한다면, 진실로 한 터럭의 사의라도 다하지 않는 바가 있으면 비록 택하여 지키고자 하여도 의심하는 사이에 홀연히 이미 지나치고 모자란 치우침에 빠져도 스스로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는 비록 무척 쉬운 것 같으나 실은 불가능한 까닭이다. 그래서 정자는 극기를 가장 말하기 어려워했으니 그 뜻이 깊다. 유씨는 순임금을 학문을 끊고 무위한 사람으로 여겼고, 양씨 또한 할 수 있으면 하는 자라고 말했으니, 그 도에 위배된 정도가 멀다. (순임금은)천하의 진실로 그러한 이치를 따라 일삼지 않는 바를 행한 것이다. 어찌 능한 것이 있겠는가? 이는 모두 노불의 남은 단서이며 양씨가 다음 장에서 논한, 알지도 할 수도 없어 도가 사람을 멀리한다는 뜻은 또한 유학자가 말할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은 정씨 문하에서 배워, 고제라는 호칭으로 불렸으나 그 말이 곧 이와 같았으니, 단지 깨달을 수 없었을 따름이다."
중용혹문10
或問: “此其記子路之問强, 何也?”
"여기서 자로가 강함을 물은 것을 기록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曰: “亦承上章之意以明擇中庸而守之非强不能而所謂强者又非世俗之所謂强也. 蓋强者力有以勝人之名也. 凡人和而無節, 則必至於流中立而無依; 則必至於倚. 國有道而富貴或不能不改其平素國無道而貧賤或不能久處乎窮約非持守之力有以勝人者其孰能及之, 故此四者汝子路之所當强也. 南方之强不及强者也. 北方之强過乎强者也. 四者之强强之中也. 子路好勇, 故聖人之言所以長其善而救其失者類如此."
"또한 앞장의 뜻을 이어 중용을 택하여 지키는 것은 강자가 아니면 불가능하며, 소위 강함이란 또한 세속에서 말하는 강함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대개 강함이란 힘으로 다른 사람을 이긴다는 이름이다. 뭇사람들이 화하되 절제함이 없으면 반드시 휩쓸림에 이르게 된다. 가운데 서도 의지함이 없으면 반드시 의지함에 이르게 된다. 나라에 도가 있어 부귀하면 때로 그 평소 지키던 바를 고치지 않을 수 없고, 나라에 도가 없어 빈천하면 때로 궁약함에 오래 머물 수 없으니, 견지하고 지키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자가 아니면 그 누가 미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 네가지는 너 자로가 마땅히 강해야 할 바이다. 남방의 강함은 강함에 미치지 못하고, 북방의 강함은 강함에 지나친다. 네가지의 강함은 강함의 중간이다. 자로는 용기를 좋아하기에 성인의 말씀이 그 훌륭한 것은 길러주고 그 잃어버린 것을 구하게 해주는 부류가 이와 같았다."
曰: “和與物同, 故疑於流而以不流爲强,中立本無所依,又何疑於倚而以不倚爲强哉!”
화하는 것은 사물과 같습니다. 그래서 휩쓸리는 것을 견주어 휩쓸리지 않는 것을 강함으로 삼은 것입니다. 가운데 서는 것은 본래 의지하는 바가 없는데 다시 어째서 의지하는 것을 견주어 의지하지 않는 것을 강함으로 삼았습니까?"
曰: “中立固無所依也. 然凡物之情唯强者爲能無所依而獨立.弱而無所依, 則其不傾側而偃仆者幾希矣. 此中立之所以疑於必倚而不倚之所以爲强也.”
"가운데 서는 것은 진실로 의지하는 바가 없다. 하지만 무릇 사물의 정은 오직 강자만이 의지하는 바가 없어 홀로 설 수 있다. 약한데 의지하는 바가 없으면 넘어지고 엎어지지 않는 자가 드물 것이다. 이것이 가운데 서는 것이 반드시 의지하는 것에 견주는 까닭이며 의지하지 않는 것이 강함이 되는 까닭이다."
曰: “諸說如何?”
"여러 설은 어떻습니까?"
曰: “大意, 則皆得之.惟以矯爲矯揉之矯,以南方之强爲矯哉之强與顔子之强,以抑而强者爲子路之强與北方之强者,爲未然耳.”
큰 뜻은 모두 얻었다. 오직 矯를 교유(손질해서 고침)의 矯로 여기거나 남방의 강함을 '굳건하다'의 강함과 안회의 강함으로 여기거나, "아니면 너의 강함"의 구절을 가지고 자로의 강함과 북방의 강함으로 여기는 것이 아직 그렇지 못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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