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중용혹문

중용혹문 1-6~8

誠之 2023. 5. 11.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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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혹문󰡕1-6

: “程子所謂隱微之際若與呂氏改本及游楊氏不同而子一之何耶?”
"정자가 말한 은미할 때는 마치 여씨가 개본한 것과 유씨, 양씨와는 다른데 그대는 하나로 여겼으니 어째서입니까?"

: “以理言之,則三家不若程子之盡. 以心言之,則程子不若三家之密是固若有不同者矣. 然必有是理然後有是心. 有是心而後有是理, 則亦初無異指也. 合而言之亦何不可之有哉!”
"리로써 말하자면 세 학자가 정자가 다한 것과 다릅니다. 심으로써 말하자면, 정자가 세 학자의 은밀함과 달라서 실로 다른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필시 이 리가 있은 연후 이 마음이 있습니다. 이 마음이 있은 이후에 리가 있다면 또한 애초에 다른 뜻이랄 게 없습니다. 합하여 말하는 것 또한 어찌 불가함이 있겠습니까!"

󰡔중용혹문󰡕1-7

: “他說如何?”
"다른 설은 어떻습니까?"

: “呂氏舊本所論道不可離者得之. 但專以過不及爲離道, 則似未盡耳. 其論天地之中性與天道一節, 最其用意深處, 然經文所指不睹不聞隱微之間者, 乃欲使人戒懼乎此, 而不使人欲之私, 得以萌動於其間耳. 非欲使人虛空其心反觀於此, 以求見夫所謂中者, 而遂執之以爲應事之準則也. 呂氏旣失其指而所引用不得於言必有事焉參前倚衡之語亦非論孟本文之意至謂隱微之間有昭昭而不可欺, 感之而能應者, 則固心之謂矣. 而又曰: '正惟虛心以求, 則庶乎見之'是又別以一心而求此一心見此一心也. 豈不誤之甚哉! 若楊氏無適非道之云, 則善矣. 然其言似亦有所未盡. 蓋衣食作息視聽擧動皆物也. 其所以如此之義理準則乃道也. 若曰: “所謂道者不外乎物,而人在天地之間,不能違物而獨立,是以無適而不有義理之準則, 不可頃刻去之而不由, 則是中庸之旨也. 若便指物以爲道而曰: “人不能頃刻而離此, 百姓特日用而不知耳, 則是不惟昧於形而上下之別而墮於釋氏作用是性之失且使學者誤謂道無不在雖欲離之而不可得吾旣知之, 則雖猖狂妄行亦無適而不爲道, 則其爲害將有不可勝言者不但文義之失而已也.”
"여씨의 구본이 논한 도는 떠날 수 없다는 것은 적당합니다. 하지만 오로지 과불급을 도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여기면 다하지 못하는 것과 같을 뿐입니다. 그가 논한 天地之中性與天道 한 절은 가장 그 용의가 깊은 점이나, 경문이 가리키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은밀한 사이라는 것은 곧 사람으로 하여금 여기에서 삼가고 두려워 하게 하려는 것이지, 인욕의 사사로움으로 하여 그 사이에 맹동하게 하는 것은 아닐 따름입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허공에서 그 마음이 여기에서 반관하여 소위 도라는 것을 알기를 구하여 마침내 그것을 잡고 응사의 준칙으로 여기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씨는 이미 그 요지를 잃어 인용한 바가 말에서 얻지 않아 (그가 말한) 필유사언, 참전의형의 말 또한 논어, 맹자 본문의 뜻이 아닙니다. 은미한 사이에 밝아서 속일 수 없고 감하여 응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데 이르면, 실로 심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바로 오직 텅 빈 마음으로 구하면 거의 알 수 있을 것이라 하였는데, 이는 또한 별도의 마음으로 하는 것이니, 이 마음을 구하여 이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어찌 오류가 심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양씨가 가는 곳마다 도 아님이 없다고 말한 것은 훌륭합니다. 하지만 그 말에 또한 미진한 바가 있는듯 합니다. 입고 먹고 움직이고 쉬고 보고 듣고 거동하는 것이 모두 物입니다. 그 이와 같은 의리 준칙이 곧 도입니다. 만약 '소위 도란 사물에서 벗어나지 않고 사람이 천지 사이에 사물을 어길 수 없고 홀로 서서 가는 곳마다 의리의 준칙이 있지 않음이 없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가는 곳마다 의리의 준칙이 있지 않음이 없고 잠깐이라도 떠나서 말미 암지 않을 수 없으니 이는 중용의 요지입니다. 만약 사물을 가리켜 도로 여겨서 '사람이 잠시라도 이것을 떠날 수 없지만 백성이 단지 일용 간에 알지 못할 뿐이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형이상하의 구별에 어두울 뿐만 아니라 석씨의 '작용이 성'이다라는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또한 배우는 자로 하여금 도는 부재함이 없어 비록 그것을 떠나고자 하지만 내가 그것을 알 수 없어서, 비록 방탕하고 망령되이 행하여도 가는 곳마다 도 아닌 것이 없다고 잘못 말하게 한다면, 그 가됨이 장차 말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 문의를 잃게 되는 것 뿐만이 아닐 따름입니다."

󰡔중용혹문󰡕1-8

: “呂氏之書, 今有二本. 子之所謂舊本, 則無疑矣. 所謂改本, 則陳忠肅公所謂程氏明道夫子之言而爲之序者子於石氏集解雖嘗辨之而論者猶或以爲非程夫子不能及也. 奈何?”
"여씨의 글은 지금 두 가지 판본이 있는데, 그대가 일컫는 구본은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소위 개본은 진충숙공이 이른바 정명도 선생의 말이라며 그것에 대한 것을 서문에 썼는데, 그대는 석씨 집해에서 그것을 일찍이 쟁론辨하였으나 논하는 자는 오히려 혹 정 선생이 아니면 다다를 수 없다고 여기는데 어찌된 것입니까?"

: “, 則愚嘗聞之劉李二先生矣. 舊本者呂氏大學講堂之初本也. 改本者其後所修之別本也. 陳公之序. 蓋爲傳者所誤而失之及其兄孫幾叟具以所聞告之然後自覺其非, 則其書已行而不及改矣. 近見胡仁仲所記侯師聖語亦與此合. 蓋幾叟之師楊氏實與呂氏同出程門師聖, 則程子之內弟而劉李之於幾叟仁仲之於師聖, 又皆親見而親聞之, 是豈胸臆私見口舌浮辨所得而奪哉! 若更以其言考之, 則二書詳略雖或不同, 然其語意實相表裏, 如人之形貌昔腴今瘠而其部位神采初不異也. 豈可不察而遽謂之兩人哉! 又况改本厭前之詳而有意於略, 故其詞雖約而未免反有刻露峭急之病, 至於詞義之間失其本指, 則未能改於其舊者尙多有之挍之明道平日之言平易從容而自然精切者, 又不啻碔砆之與美玉也. 於此而猶不辨焉, 則其於道之淺深固不問而可知矣.
"이는 내가 일찍이 류, 이 두 선생에게 들은 것입니다. 구본은 여씨의 대학강의의 초본입니다. 개본은 그 후 수정한 별본입니다. 진공의 서문은 전하는 사람에 의해 오류가 생겨서 잘못한 것입니다. 그 형 손기수가 모두 들은 바로 알려준 이후에야 그 잘못됨을 자각 했으나 그 글은 이미 간행되어 고치지 못했습니다. 최근 호인중이 기록한 후사성의 말을 보니 또한 이와 부합합니다. 대저 손기수의 스승 양씨는 실로 여씨와 더불어 정씨 문하의 후사성에서 함께 나왔으니, 정자의 처남內弟이면서 류, 이가 손기수에게, 호인중이 후사성에게, 또한 모두 직접 보고 들었으니 이것이 어찌 흉중에 사견과 구설과 부변이 빼앗을 수 있는 바이겠습니까! 만약 더욱 그 말로써 고찰하면 두 글의 자세함과 간략함이 비록 혹 같지 않으나, 그 말뜻은 실제 서로 표리가 되니, 마치 사람의 형모가 예전에는 살쪘다가 지금은 야위어도 그 부위의 정신과 풍채神采는 다르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어찌 살피지 않고 성급히 그 사람을 두 사람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또한 하물며, 개본이 이전의 상세함을 싫어하여 간략함에 뜻을 두었기에, 그 말이 비록 요약되었어도 도리어 뚜렷하고 성급한 병통이 있음을 면하지 못합니다. 말뜻 사이에 그 본지를 잃음에 이르면, 그 오래된 것에서 고치지 못한 것이 오히려 많습니다. 그것을 명도의 평소 말과 평이하고 조용하며 자연히 정절한 것과 비교해보면, 또한 아름다운 옥과 비교한 쓸모없는 돌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오히려 쟁론하지 않으면 그들의 도에 대한 얕고 깊음을 실로 묻지 않아도 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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