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중용혹문

중용혹문 1-5

誠之 2023. 5. 9.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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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혹문󰡕1-5

或問: “旣曰: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非道也. 故君子戒愼乎其所不睹恐懼乎其所不聞矣. 而又曰: “莫見乎隱莫顯乎微, 故君子愼其獨也. , 何也?”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떠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 그래서 군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신하고 들리지 않는 곳에서 공구한다'라고 하고, "은미한 것보다 잘 보이는 것이 없고, 미세한 것보다 잘 드러나는 것이 없으니, 그래서 군자는 홀로 있음을 삼간다'라고 하였는데 무엇입니까?"

: “此因論率性之道以明由敎而入者其始當如此. 蓋兩事也. 其先言道不可離而君子必戒謹恐懼乎其所不睹不聞者, 所以言道之無所不在, 無時不然, 學者當無須臾毫忽之不謹而周防之, 以全其本然之體也. 又言莫見乎隱莫顯乎微而君子必愼其獨者, 所以言隱微之間人所不見而已獨知之, 則其事之纖悉無不顯著, 又有甚於他人之知者, 學者尤當隨其念之方萌而致察焉, 以謹其善惡之幾也. 蓋所謂道者率性而已性無不有, 故道無不在, 大而父子君臣, 小而動靜食息, 不假人力之爲而莫不各有當然不易之理, 所謂道也. 是乃天下人物之所共由, 充塞天地, 貫徹古今而取諸至近, 則常不外乎吾之一心, 循之則治, 失之則亂. 蓋無須臾之頃可得而暫離也. 若其可以暫合暫離而於事無所損益, 則是人力私智之所爲者而非率性之謂矣. 聖人之所修以爲敎者因其不可離者而品節之也. 君子之所由以爲學者因其不可離者而持守之也. 是以日用之間須臾之頃持守工夫一有不至,則所謂不可離者雖未嘗不在我而人欲間之, 則亦判然二物而不相管矣. 則雖曰: “有人之形"而其違禽獸也. 何遠哉! 是以君子戒愼乎其目之所不及見, 恐懼乎其耳之所不及聞, 瞭然心目之間, 常若見其不可離者, 而不敢有須臾之間, 以流於人欲之私, 而陷於禽獸之域. 若書之言防怨而曰: ‘不見是圖’, 禮之言事親而曰: ‘聽於無聲視於無形’, 蓋不待其徵於色發於聲, 然後有以用其力也. 夫旣已如此矣, 則又以謂道固無所不在, 而幽隱之間乃他人之所不見, 而已所獨見; 道固無時不然, 而細微之事, 乃他人之所不聞, 而已所獨聞. 是皆常情所忽以爲可以欺天罔人而不必謹者而不知吾心之靈皎如日月旣已知之, 則其毫髮之間無所潛遁又有甚於他人之知矣. 又况旣有是心藏伏之久, 則其見於聲音容貌之間發於行事施爲之實必有暴著而不可揜者又不止於念慮之差而已也. 是以君子旣戒懼乎耳目之所不及, 則此心常明不爲物蔽而於此尤不敢不致其謹焉必使其幾微之際無一毫人欲之萌而純乎義理之發, 則下學之功盡善全美而無須臾之間矣. 二者相須皆反躬爲己遏人欲存天理之實事. 蓋體道之功莫有先於此者亦莫有切於此者, 故子思於此首以爲言以見君子之學必由此而入也.”
"이는 솔성의 도를 논한 것에 인하여, 가르침에 말미암아 들어가는 자는 그 시작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함을 밝히고 있습니다. 대개 두 가지 일은, 먼저 도가 떠날 수 없어 군자는 반드시 그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바에 삼가고 두려워함을 말하여,  도가 부재하는 바가 없고 그렇지 않은 때가 없어, 배우는 자가 마땅히 잠시라도, 털끝 만큼도 삼가지 않음이 없고 두루 禍患을 막아周防, 그 본연의 체를 온전히 함을 말합니다. 또한 은미한 것보다 잘 보이는 것이 없고, 미세한 것보다 잘 드러나는 것이 없어 군자는 반드시 홀로 있음을 삼감을 말하여 은미하고 미세한 사이에 사람이 보지 못하는 바이지만 이미 홀로 알고 있으니, 그 일의 사소한 것도 드러나지 않음이 없어 또한 다른 사람이 아는 것보다 심한 것이 있어, 배우는 자가 더욱 마땅히 그 사념이 막 움틀 때를 따라 치찰하여 그 선악의 기미를 삼감을 말합니다. 대개 소위 도란 성을 따를 뿐이나 성이 없지 않아서 도가 부재함이 없으니, 크게는 부자, 군신 관계이며, 작게는 움직이고 고요하고, 먹고 쉬는 것이니, 사람의 힘이 행함을 빌리지 않고도 각기 마땅히 그러하고 바뀌지 않는 이치가 있으니, 이른바 도입니다. 이는 천하 사람, 사물이 공유하는 바이며, 천지를 가득 채우고 고금을 관철하여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취하는 것이니 항상 나의 마음 밖에 있지 않아서, 따르면 다스려지고, 잃으면 어지러워집니다. 대개 잠시 잠깐이라도 떨어질 수 없습니다. 만약 잠시 붙었다 떨어져 일에 덜고 더하는 바가 없다면, 이는 사람의 힘, 사사로운 지혜가 하는 바이니, 성을 따르는 것을 이름이 아닙니다. 성인이 닦아서 가르침으로 삼는 것은 그 떨어질 수 없는 것으로 품절한 것입니다. 군자가 말미암아 학문으로 삼는 것은 그 떨어질 수 없는 것으로 지켜낸 것입니다. 그래서 일용지간에 잠시 잠깐 지켜내는 공부가 한번 이르지 못하면 소위 떨어질 수 없는 것이 비록 나에게 있지 않은 적이 없지만 인욕이 사이에 끼어들어 판연히 두 사물이 서로 관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하면 비록 '사람의 형체가 있다'고 말해도 금수와 다르지 않음이 어찌 멀겠습니까! 그래서 군자는 그 눈이 보지 못하는 바에 계신하고 그 귀가 듣지 못하는 바에 공구하니, 료연히 마음과 눈 사이에 항상 마치 그 떠날 수 없는 것을 보아 감히 잠시라도 인욕의 사사로움으로 흘러가 금수의 영역에 빠지지 않습니다. 마치 서에서 防怨을 말하며 '드러나기 전에 도모하라'하고, 예에서 事親을 말하며 '소리 없는 곳에서 듣고 형체 없는 곳에서 보라'하니, 대개 그 색깔에서 나타나고 소리에서 발하기를 기다린 연후에 힘을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이와 같으면 또한 도는 실로 부재한 곳이 없어 그윽하고 은미한 사이에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바이지만, 이미 홀로 보는 바이며, 도는 실로 그렇지 않은 때가 없으나, 세세하고 은미한 사이에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는 바이지만, 이미 홀로 듣는 바이니, 이는 모두 인지상정이 소홀히 하는 것으로, 하늘과 사람을 속이고도 반드시 삼가는 것은 아니지만, 내 마음의 영묘하고 밝음이 해와 달과 같음을  이미 알지 못하면, 그 터럭 사이에 물러나는潛遁 바가 없어 또한 다른 사람이 아는 것보다 심한 것이 있습니다. 또한 게다가 이 마음이 잠복됨이 오래되면, 그것이 소리와 용모 사이에 드러나고, 일을 행함에 드러나고, 베푸는 실상에 반드시 드러나서 가려지지 않는 것이 있으니, 또한 사려의 차이에 그치지 않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군자는 귀과 눈이 미치지 못하는 바에 삼가고 두려워하니, 이 마음이 항상 밝아 사물에 가려지지 않고, 여기에 더욱 감히 그 삼감에 이르지 않음이 없습니다. 반드시 그 기미의 때에 한 터럭의 인욕의 움틈이 없게 하여 의리가 발함에 순수하면, 아래서부터 배우는 공이 선을 다하고 미를 온전케 하여 잠시 간의 차이도 없을 것입니다. 두 가지는 서로 의존하여 스스로 검속하여 자신을 위하고 인욕을 제거하고 천리를 보존하는 실제적인 일입니다. 대개 도를 체현하는 공은 이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또한 이것보다 절실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사는 이 첫머리에서 군자의 학문은 반드시 여기에서 말미암아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 “諸家之說皆以戒愼不睹恐懼不聞卽爲謹獨之意子乃分之以爲兩事無乃破碎支離之甚耶?”
"여러 학파의 설은 모두 보이지 않는 곳에 계신하고 들리지 않는 곳에 공구하는 것을 근독의 뜻으로 삼았는데, 그대는 그것을 나누어 두 가지 일로 삼았으니 너무 쪼개고 지리함이 심한 것 아닙니까?"

: “旣言道不可離, 則是無適而不在矣. 而又言莫見乎隱莫顯乎微, 則是要切之處尤在於隱微也. 旣言戒謹不睹恐懼不聞, 則是無處而不謹矣. 又言謹獨, 則是其所謹者尤在於獨也. 是固不容於不異矣. 若其同爲一事, 則其爲言又何必若是之重複耶? 且此書卒章潛雖伏矣 不愧屋漏, 亦兩言之正與此相首尾, 但諸家皆不之察, 獨程子嘗有不愧屋漏與謹獨, 是持養氣象之言, 其於二者之間, 特加與字, 是固已分爲兩事, 而當時聽者有未察耳.
"이미 도가 떠날 수 없다고 말하였으니 이는 가는 곳마다 부재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한 은미한 것보다 더 보이는 것 없고 미세한 것보다 더 드러나는 것이 없다고 말했으니 이 긴요하고 절실한 곳은 은미함에 있습니다. 이미 보이지 않는 곳에 삼가고 들리지 않는 곳에 두려워한다고 말하였으니, 이는 처하는 곳마다 삼가지 않음이 없습니다. 또한 홀로 삼감을 말하였으니, 이는 그 삼가하는 바가 더욱 홀로 있음에 있습니다. 이는 실로 다르지 않음을 허용하지 않는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똑같이 한 가지 일이 되면, 그 말은 또한 하필 이와 같이 중복되겠습니까? 게다가 이 글의 끝 장은 비록 잠복되어도 나쁜 짓을 하거나 품지 않으니不愧屋漏, 또한 두 말의 바름이 이것과 서로 머리와 꼬리가 되지만, 여러 학파는 모두 살피지 못하였고, 오직 정자가 일찍이 나쁜 짓을 하거나 품지 않음不愧屋漏과 홀로 있음을 삼감이 있었으니, 이 기상을 견지하고 기르는 말은 두 가지 사이에 다만 與자를 더하여 실로 이미 두 가지 일이 되게 하였으나, 당시 듣는 자들은 살피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 “子又安知不睹不聞之不爲獨乎?”
"그대는 또한 어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음이 홀로 있음이 되지 않음을 압니까?"

: “其所不睹不聞者已之所不睹不聞也. 故上言道不可離而下言君子自其平常之處無所不用其戒懼而極言之以至於此也. 獨者人之所不睹不聞也. 故上言莫見乎隱莫顯乎微而下言君子之所謹者尤在於此幽隱之地也. 是其語勢自相唱和各有血脈, 理甚分明. 如曰: “是兩條者皆爲謹獨之意, 則是持守之功, 無所施於平常之處, 而專在幽隱之間也. 且雖免於破碎之譏而其繁複偏滯而無所當亦甚矣.”
"그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것은 자기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도가 떨어질 수 없음을 말하고 다음에 군자가 스스로 평상시에 처함에 그 삼감을 사용하지 않는 바가 없음을 말하니 그것을 지극히 말한 것이 여기에 이른 것입니다. 홀로 있음이란 다른 사람이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은미한 것보다 잘 보이는 것은 없고, 미세한 것보다 잘 드러나는 것은 없음을 말하고 다음에 군자가 삼가는 바가 더욱 이 그윽하고 은미한 곳에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이는 그 말의 기세가 스스로 서로 호응唱和하여 각기 혈맥이 있어 이치가 심히 분명합니다. 만약 '이 두가지 조목이 모두 홀로 있음을 삼가는 뜻'이라고 말한다면, 이 지켜내는 공이 평상시 처함에 베푸는 바가 없고 오로지 그윽하고 은미한 사이에 있을 뿐입니다. 게다가 비록 쪼갠다는 비웃음을 면할지라도, 그 번잡하고 복잡하고 치우치고 막혀 마땅함이 없음이 또한 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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