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혹문1-13
曰: “程呂問答如何?”
"정이천과 여대림(?)의 문답은 어떻습니까?"
曰: “考之文集, 則是其書. 蓋不完矣. 然程子初謂凡言心者, 皆指已發而言而後書乃自以爲未當, 向非呂氏問之之審而不完之中, 又失此書, 則此言之未當, 學者何自而知之乎, 以此又知聖賢之言, 固有發端而未竟者, 學者尤當虛心悉意以審其歸未可執其一言而遽以爲定也. 其說中字因過不及而立名, 又似倂指時中之中而與在中之義少異. 蓋未發之時在中之義謂之無所偏倚則可, 謂之無過不及, 則方此之時未有中節不中節之可言也. 無過不及之名亦何自而立乎? 又其下文皆以不偏不倚爲言, 則此語者亦或未得爲定論也. 呂氏又引允執厥中, 以明未發之旨, 則程子之說書也. 固謂允執厥中所以行之. 蓋其所謂中者乃指時中之中, 而非未發之中也. 呂氏又謂求之喜怒哀樂未發之時, 則程子所以答蘇季明之問, 又已有旣思卽是已發之說矣. 凡此皆其決不以呂說爲然者, 獨不知其於此, 何故略無所辨, 學者亦當詳之, 未可見其不辨而遽以爲是也.”
"문집에 보면 그 글은 불완전합니다. 하지만 정 선생은 초기에 심이라고 말한 것은 모두 이발을 가리켜 말한 것으로, 이후에 글에서 이내 스스로 마땅하지 않다고 여겼고, 그렇지 않다면向非 여씨의 물음이 자세한데도 불완전한 가운데 또한 그 글을 실전했으니, 그 말의 마땅하지 않음을 배우는 자가 어찌 스스로 알겠습니까? 이로써 또한 성현의 말을 아는 것은 실로 발단이 있어도 끝마치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배우는 자가 더욱 마땅히 마음을 비우고 뜻을 다하여 그 지향점을 살피어야 합니다. 그 한 마디 말을 가지고 성급히 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말하는 중이란 글자는 과불급에 따라 이름 붙인 것이니 또한 시중의 중을 아울러 가리켜, '가운데에 있다'는 뜻과 조금 다른 듯 합니다. 대저 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 가운데에 있다는 뜻은 치우치거나 의지하는 바가 없다는 것을 말하니 可하고, 과불급이 없다고 말하면, 이 때에는 중절, 부중절이라고 말할 것이 없습니다. 과불급이 없다는 명칭이 또한 어찌 스스로 자리한 것이겠습니까? 또한 그 아래 글이 모두 치우치지도 의지하지도 않는 것을 말씀으로 삼으니 그 말씀 또한 혹 정론이 될 수 없습니다. 여씨는 또한 윤집궐중을 인용하여 미발의 뜻을 밝혔으니, 정자의 논설입니다. 실로 윤집궐중으로 행하는 바라고 하셨습니다. 대개 그 소위 중이란 시중의 중을 가리키며, 미발의 중이 아닙니다. 여씨는 또한 희노애락 미발의 때에서 구하기를 말한 것은, 정자가 소계명의 질문에 답한 바입니다. 또한 이미 생각함이 바로 그것이라 함이 있으니, 이발의 설입니다. 무릇 이는 모두 결코 여씨의 설이 그렇다고 여긴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가 여기에서 알지 못했으니, 무엇 때문에 간략히 변별하는 바가 없겠습니까? 배우는 자는 또한 마땅히 상세히 살펴서 그 변별하지 않은 것을 보고 성급히 옳은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曰: “然則程子卒以赤子之心爲已發, 何也?”
"그러면 정자가 마침내 적자지심을 이발로 삼은 것은 어째서입니까?"
曰: “衆人之心莫不有未發之時, 亦莫不有已發之時, 不以老稚賢愚而有別也. 但孟子所指赤子之心純一無僞者, 乃因其發而後可見. 若未發則純一無僞又不足以名之而亦非獨赤子之心爲然矣. 是以程子雖改夫心皆已發之一言而以赤子之心爲已發, 則不可得而改也.”
"뭇사람들의 마음은 미발의 때가 없지 않고, 또한 이발의 때도 없지 않습니다. 늙고 어리고 현명하고 우매한 것으로 구별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맹자가 가리킨 적자지심은 순일하여 거짓이 없습니다. 이에 그 발한 것에 인한 이후에 볼 수 있습니다. 미발은 순일하여 거짓없음으로 또한 명명하기 부족합니다. 그리고 또한 유독 적자지심이 그러한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정자는 비록 마음이 모두 이발이라는 한 마디를 고쳤으나, 적자지심을 이발로 여기는 것은 고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曰: “程子明鏡止水之云固以聖人之心爲異乎赤子之心矣. 然則此其爲未發者耶?”
"정자가 밝은 거울에 고요한 물이라고 한 것은 실로 성인의 마음을 적자지심과 다른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미발인 것입니까?"
曰: “聖人之心未發, 則爲水鏡之體. 旣發, 則爲水鏡之用亦非獨指未發而言也.”
"성인의 마음이 아직 발하지 않으면 물과 거울의 체가 되고, 이미 발하면 물과 거울의 작용이 되니 또한 유독 미발을 가리켜 말한 것은 아닙니다."
曰: “諸說如何?”
"여러 설은 어떻습니까?"
曰: “程子備矣, 但其答蘇季明之後章記錄多失, 本眞答問不相對値. 如耳無聞, 目無見之答以下文, 若無事時, 須見須聞之說參之, 其誤必矣."정자의 말이 갖추었습니다. 하지만 그 소계명에게 답한 이후 장의 기록은 많이 잃어버려, 본래 진짜 답문은 서로 짝지을對値 수 없습니다. 예컨대 귀에 들음이 없고 눈에 봄이 없다는 답 이하의 글은, '만일 일이 없을 때 모름지기 보고 들어야 한다는 말'을 살펴보면 그 오류가 분명합니다. 蓋未發之時但爲未有喜怒哀樂之偏耳. 대저 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는 단지 희노애락의 치우침이 없다는 것 뿐입니다. 若其目之有見, 耳之有聞, 則當愈益精明而不可亂, 豈若心不在焉而遂廢耳目之用哉! 만약 눈이 보는 것이 있고, 귀가 듣는 것이 있다면, 마땅히 더욱 자세하고 밝아서 어지러울 수 없으니, 어찌 마음이 부재하여 마침내 이목의 작용을 폐하겠습니까! 其言靜時旣有知覺, 豈可言靜而引復以見天地之心爲說, 亦不可曉. 蓋當至靜之時, 但有能知覺者, 而未有所知覺也. 고요할 때 이미 지각이 있다고 하는데, 어찌 고요함을 말하면서 복괘를 인용하여 천지의 마음을 보는 것을 설로 삼겠습니까! 또한 밝을 수 없습니다. 대저 지극히 고요할 때 단지 지각할 수 있지만 지각하는 바는 없습니다. 故以爲靜中有物則可, 而便以纔思卽是已發爲比則未可; 以爲坤卦純陰而不爲無陽則可, 而便以復之一陽已動爲比, 則未可也. 그래서 고요한 가운데 사물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可하지만, 생각함이 곧 이발이라는 것으로 견주는 것은 가당치 않습니다. 곤괘가 순음으로 이루어졌으나 양이 없다고 볼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은 가하지만, 복괘의 일양이 이미 움직였다는 것으로 견주는 것은 가당치 않습니다. 所謂無時不中者, 所謂善觀者, 却於已發之際觀之者, 則語雖要切而其文意亦不能無斷續, 至於動上求靜之云, 則問者又轉而之他矣. 소위 중절하지 않은 때가 없다는 것과 소위 잘 본다는 것을 이발의 때에 본다면 말은 비록 요절하지만 그 문장의 뜻은 또한 끊어짐과 이어짐이 없을 수 없고 움직임 상에서 고요함을 구한다고 말하는 데 이르면 묻는 자는 또한 돌아서 다른 데로 갈 것입니다. 其答動字靜字之問, 答敬何以用功之問, 答思慮不定之問, 以至若無事時須見須聞之說, 則皆精當. 動字靜字의 질문에 답하는 것과, 경은 어찌 공을 들여야 하는 질문에 답하는 것과, 사려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물음에 답하는 것에서 일이 없을 때 모름지기 보고 들어야 한다는 말은 모두 정당精當합니다. 但其曰: “當祭祀時無所見聞, 則古人之制祭服而設旒黈, 雖曰: “欲其不得廣視雜聽而致其精一, 然非以是爲眞足以全蔽其聰明使之一無見聞也. 하지만 '제사지낼 때 보고 들은 바가 없다'라고 말한다면, 옛사람이 제복을 정하고 면류관을 갖출 때 비록 널리 보거나 잡다히 듣지 않아서 정일함에 이르고자 하였다'라고 하더라도, 이로써 진짜 그 총명함을 전부 가려서 하나도 보고 들음이 없게 하기에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若曰: “履之有絇以爲行, 戒尊之有禁以爲酒戒, 然初未嘗以是而遂不行不飮也. 만약 신발에 장신구가 있는 것을 행으로 여기고, 계준에 금기가 있는 것을 주계로 여긴다고 말하지만, 애초에 이것으로써 마침내 행하지 않거나 마시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若使當祭之時眞爲旒纊所塞遂如聾瞽, 則是禮容樂節皆不能知, 亦將何以致其誠意交於鬼神哉! 만약 제사지낼 때 진짜로 면류관에 의해 가로 막혀 마치 농인과 맹인과 같게 한다면, 그 예용악절을 모두 알 수 없으니 또한 장차 어찌 성의를 다하여 귀신과 교우하겠습니까! 程子之言決不如是之過也. 정자의 말은 결코 이와 같지 않습니다. 至其答過而不留之問, 則又有若不相値而可疑者. 大抵此條最多謬誤. 그 지나치되 남김이 없다는 물음에 답함에 이르면, 또한 서로 들어맞지 않아 의심할 만한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대저 이 조목은 가장 오류가 많습니다. 蓋聽他人之問, 而從旁竊記非唯未了答者之意而亦未悉問者之情, 是以致此亂道而誤人耳. 대개 다른 사람의 질문을 들으면 곁에서 기록한 것이 답하는 자의 뜻을 끝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질문하는 자의 情도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이르러 도를 어지럽히고 다른 사람을 오인케 한 것 뿐입니다. 然而猶幸其間, 紕漏顯然, 尙可尋繹以別其僞, 獨微言之湮沒者, 遂不復傳爲可惜耳. 하지만 오히려 다행히 그 사이에 잘못이 명백하여 일찍이 찾아 살피어尋繹 그 거짓을 변별하였으나, 오직 미언이 사라진 것을 마침내 다시 전하지 못하는 것이 애석할 따름입니다. 呂氏此章之說尤多可疑, 如引屢空貨殖, 及心爲甚者, 其於彼此, 蓋兩失之. 其曰: “由空而後見夫中是又前章虛心以求之說也. 其不陷而入浮屠者幾希矣. 여씨의 이 장의 말은 더욱 의심할 바가 많으니, 예컨대 누공화식을 인용하여 마음에 이르는 것은 더욱 심하니, 그는 여기 저기에서 양쪽으로 그르쳤습니다. 蓋其病根正在欲於未發之前求見夫所謂中者而執之, 是以屢言之而病愈甚, 殊不知經文所謂致中和者, 亦曰: “當其未發, 此心至虛, 如鏡之明, 如水之止, 則但當敬以存之而不使其小有偏倚, 至於事物之來, 此心發見喜怒哀樂各有攸當, 則又當敬以察之而不使其小有差忒, 而已未有如是之說也.대개 그 병의 근원이 바로 아직 발하기 전에 소위 중이라는 것을 보고 잡기를 구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누차 말하여도 병이 더욱 심해지고 특히 경문이 말하는 치중화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또한 '미발의 때에 이 마음이 지극히 텅 비기가 마치 거울의 밝음 같고 물의 고요함 같다'라고 하니, 마땅히 경으로써 보존하고 조금도 치우침과 의지함이 없게 해야 합니다. 사물이 다가올 때, 이 마음이 희노애락을 발현함에 각기 마땅한 바가 있으면, 또한 경으로 살피고 조금도 어긋남이 없게 해야 하지만 이와 같은 설은 있지 않았습니다. 且曰: “未發之前, 則宜其不待著意推求而瞭然心目之間矣. 一有求之之心, 則是便爲己發固已不得而見之,况欲從而執之, 則其爲偏倚亦甚矣. 又何中之可得乎! 且夫未發已發,日用之間,固有自然之機,不假人力,方其未發,本自寂然,固無所事於執, 及其當發, 則又當卽事卽物隨感而應亦安得塊然不動而執此未發之中耶? 또 말하길, 아직 발하기 전에, 마땅히 의념이 드러나서 추구하기를 기다리지 않으면 눈과 마음 사이가 명백해질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한번 구하는 마음이 있으면, 이는 자기가 발하여 실로 이미 볼 수 없으니, 하물며 좇아서 잡고자 하면, 그 치우치고 기댐이 또한 심해질 것입니다. 또한 어찌 중이 얻어질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무릇 미발 이발은 일용지간에 실로 스스로 그러한 기틀이 있으니,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습니다. 이윽고 그 미발은 본래 스스로 적연하여 실로 잡는 데 일삼는 바가 없고, 그것이 발하면, 또한 사물에 나아가 감응하니 또한 어찌 홀로塊然 움직이지 않고 이 미발의 중을 잡겠습니까? 此爲義理之根本,於此有差, 則無所不差矣. 이는 의리의 근본이니, 여기에서 차이가 있으면 차이나지 않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此呂氏之說所以條理紊亂, 援引乖刺而不勝其可疑也. 이는 여씨의 설이 조리가 문란하고 괴려한 것을 인용하여 그 의심할 만한 것을 이루 다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程子譏之,以爲不識大本,豈不信哉! 정자가 그것을 비난하여 대본을 알지 못한다고 여겼으니 어찌 믿지 못하겠습니까! 楊氏所謂未發之時以心驗之, 則中之義自見,執而勿失,無人欲之私焉, 則發必中節矣. 양씨가 말한 미발의 때에 마음으로 증험하라 한 것은 중의 뜻이 자연히 드러나 굳게 잡고 잃지 말라 한 것이니 인욕의 사사로움이 없으면, 발하여 반드시 중절할 것입니다. 又曰: “須於未發之際能禮所謂中其曰: “驗之體之執之, 則亦呂氏之失也. 또 말하기를 '모름지기 미발의 때에 이른바 중을 예우하여라'라고 했고, '증험하고 체현하고, 굳게 잡으라' 하였으니 또한 여씨의 잘못입니다. 其曰: “其慟其喜中,固自若, 疑與程子所云言和, 則中在其中者相似,然細推之, 則程子之意,正謂喜怒哀樂已發之處,見得未發之理,發見在此一事一物之中,各無偏倚過不及之差,乃時中之中,而非渾然在中之中也. 그가 말하길 '슬퍼하고慟 기뻐하는 가운데'라고 하였는데, 실로 자약하나, 정자가 말한 和를 말한 것은, 중이 그 가운데에 있다는 것과 비슷하나, 세밀하게 추론하면, 정자의 뜻은 바로 희노애락이 이미 발한 곳에서 미발의 이치가 이 일사 일물 가운데 있어 각기 치우치거나 과불급의 차이가 없음을 보라고 한 것이니, 시중의 중이지, 혼연히 가운데에 있다의 중이 아닙니다. 若楊氏之云中,固自若, 而又引莊周出怒不怒之言以明之, 則是以爲聖人方當喜怒哀樂之時,其心漠然,同於木石,而姑外示如此之形,凡所云爲皆不復出於中心之誠矣. 大抵楊氏之言多雜於佛老, 故其失類如此.其曰: “當論其中否不當論其有無, 則至論也.” 양씨가 말한 중은 실로 자약하나 또한 장주의 노여울 때 노여워하지 않는다出怒不怒는 말로 밝혔으니, 이는 성인이 바야흐로 희노애락의 때에 그 마음이 막연하여 목석과 같지만 다만 겉으로 이와 같은 형태를 보인 것이라 여겼으니, 무릇 말하고 행하는 바가 모두 다시 중심의 성에서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대저 양씨의 말은 불노에 섞인 것이 많아서 그 잘못의 부류가 이와 같습니다. 그가 말하길 '마땅히 중의 여부를 논해야지, 유무를 논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으니 지극한 논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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